역사 궤적
청나라 통치 시기
소족(邵族)의 전설에 의하면 소족 사냥꾼들이 흰 사슴을 쫓다가 우연히 아름다운 일월담을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호수속에는 많은 물고기와 새우가 살았으므로 이후 부족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옮겨와 살게 되었습니다. 초기에 소족은 일월담 주변지역에 거주하였는데 청나라 도광제 이전의 조사기록에 의하면 소족부락은 현재의 수사(水社), 석인(石印), 모포(茅埔), 신성(新城), 중명(中明), 두사촌(頭社村) 등지에 분포하고 있었으나 청나라 도광제 시기에 이르러서는 한인의 개척범위가 점차 확대되어 소족부락 지역에까지 미치게 되었고 또한 청나라 동치제 시기에 실시된 「개척지를 개간하고 원주민을 한인화」하려는 정책의 영향으로 한족이 대량 유입되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역병이 창궐하여 소족 부족은 전염을 피하기위해 원래 살던 부락의 바깥지역으로 이주를 하였는데 그곳이 현재의 일월촌(日月村), 대평림(大坪林) 등지입니다.
일제 시기
청나라 광서제 21년 (1895년, 일본 메이지28년) 청일 갑오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여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고 타이완과 펑후도를 일본에 영토분할함으로써 일본에 의한 타이완 통치의 서막이 열렸습니다. 일본 통치 초기에는 일정기간의 무력진압을 거쳐 식민지의 기초건설을 추진하였고 내륙에 위치한 일월담 또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제당업의 발전을 위해 일본인은 수사연(水沙連) 지구를 전통적인 제당공장으로 지정하여 포리(埔里)사제당주식회사로 통합시켰으며 다이쇼(大正) 5-6년(1916-1917)에 이르러서는 경편철도가 설치되었습니다. 이 경편철도의 개통으로 안쪽에 있던 산이 서부지역과 관통이 되며 일월담의 아름다운 풍광이 널리 알려짐과 더불어 교통의 발달에 따라 일월담은 타이완의 저명 관광명소가 되었습니다.
국민정부 시기
1949년 국민당 정부가 타이완으로 퇴각해온 이후 일월담은 당시 장개석 선생이 가장 즐겨찾는 명승지가 되었습니다.
그 이전 일제 시기 다이쇼(大正)5년(1916) 일본인 이토(伊藤)선생이 호수변에「함벽루-涵碧樓」를 건설하였는데 1917-1918년간의 지진에도 끄떡없이 건재하여 그 후로 고위관료와 저명인사가 일월담에서 쉬어가는 장소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장개석 선생은 각국의 국빈이 타이완을 방문하면 일월담에 초대하여 함벽루를 영빈관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장개석 선생은 막강한 권위로 일월담에 현광사, 현장사, 문무묘, 자은탑, 장공행관, 호수도로 등 각종 건설을 완성하여 일월담 일대는 장관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는 중국의 봉건적 통치관에서 비롯된 통치자의 「유아독존」적 권위를 강조한 것으로 건물이 모두 높은 곳 또는 주요 명승지를 택하여 지어졌음을 볼때 장개석 선생의 천하군림적 사고를 엿볼 수 있습니다.
장씨 정권은 근 반세기에 걸쳐 타이완을 통치했는데 장개석 선생이 1975년 서거후 장씨의 정치세력이 퇴색함에 따라 이전과 같은 일월담의 건설 및 발전을 주도하기는 어렵게 되었습니다. 세계의 빠른 변화와 발전 추세에 발맞춰 각지의 관광 명소가 창설되고 개발되었지만 일월담은 점점 낙후되어 환경과 서비스 및 이미지 제고 등의 문제에 맞닥뜨렸는데 1999년9월21일 대지진은 일월담 개조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월담의 탈바꿈
대만관광청은 일월담 주변의 재건을 가속화하기 위해 2000년1월24일 일월담국가풍경관리처를 신설하고 지진 발생이후 일월담 지구의 재건 및 발전의 중대 임무를 일임하였습니다. 이에 일월담은 부서진 잔해에서 재건되었고 보다 안전하고 지속적으로 진흥되어 아름답고 문화가 살아 숨쉬는 21세기 고요하고 청정한 호수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근래에도 일월담국가풍경관리처는 풍경구의 경영관리 및 여행안전에 초점을 두고 다양한 계획과 건설공정, 각종 이벤트를 진행하는 등 유형 무형의 건설을 통해 풍경구의 여행과 휴식 환경의 질을 높임으로써 여행객이 아름다운 추억을 가득 안고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